에디슨 특허 독점 피난처로 美 LA 선택
할리우드, 기후, 환경, 낮은 세금 등 매력적 요소 가득
영화인들에게 좋지 않은 시선...텃새 심했던 할리우드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1914년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진창에 빠졌고 그 이전까지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유럽의 영화 산업은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이전 전쟁과는 다른 총력전에 가까운 현대 전쟁의 양상으로 전후방이 딱히 구분되지 않는 현대전.
유럽 영화계는 이런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피할 곳을 찾았고, 그들의 눈이 향한 곳은 대서양 건너 미국이었다.
이미 유럽과 미국의 영화 산업은 하나의 시장처럼 돌아가고 있었고, 많은 유럽의 영화인들이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비즈니스를 해 왔기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새로운 문화와 예술의 도시 뉴욕과 시카고에 터를 잡고 있던 미국 영화계는 갑작스러운 유럽 영화계의 유입과 함께 보다 넓은 곳으로 세를 확장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들이 선택한 곳은 새로운 개척의 땅 서부에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 로스엔젤레스(LA)였다.
영화인들이 할리우드를 선택한 이유
LA는 영화를 만들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다. 풍부한 일조량과 함께 비가 적었고, 이는 촬영을 할 수 있는 날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20세기 초만해도 LA는 도시로 탈바꿈한지 얼마 안됐던터라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광활하고 넓은 빈 땅들이 널려 있었다.
주변에는 사막, 황무지, 계곡, 숲, 바다 등 영화 촬영에 필요한 다양한 풍경들을 차로 몇 시간 이동 거리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영화사들의 경영인들은 캘리포니아 주의 아주 싼 세금에 반했다. 뉴욕이나 시카고의 높은 세금에 비하면 이주민들을 모으기 위해 내걸었던 캘리포니아의 낮은 조세제도는 영화인들에게 큰 메리트를 제공했다.
이외에 숨은 이유도 있었다. 1900년 대 초반 대부분의 영화 관련된 특허들은 토머스 에디슨의 영화 특허 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자들은 툭하면 그들로부터 특허를 침범했다고 소송을 당했으며, 이는 제작 중단이나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을 제공했다.
영화 제작자들에게 에디슨의 특허 소송을 피하기 위해 특허법 적용이 조금은 느슨했던 LA로 본거지를 옮기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새로운 땅 캘리포니아로의 이주를 결심한 영화인들은 LA 이곳 저곳을 돌며 어디로 갈지를 고민했다. 캘리포니아는 넓고 광활했지만 아직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기에 인프라가 부족했던 LA에 대도시 생활에 오래 젖어 있었던 영화인들을 만족 시킬 만한 좋은 입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1911년 젊고 진취적인 영화 제작자 알 크리스티(Al Christie)가 ‘할리우드’라는 작은 마을에 나타났을 때, 할리우드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서 영화를 제작한다고 말하는 그를 비웃었다.
지금이야 LA 도심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지만, 당시의 할리우드 마을은 LA 외곽에 위치해 1910년에야 LA에 막 편입된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비포장 도로에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오렌지와 레몬나무 밭이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크리스티는 마을 한 구석에 버려져 있던 작고 오래된 블롱도(Blondeau)라는 선술집을 얻어 거기에 ‘네스터(Nestor)필름 컴퍼니’를 세웠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첫 영화 세트가 이 낡은 선술집의 뒷 마당에 세워졌다. 네스터 필름 컴퍼니는 현재 꿈의 공장이라 불리우는 할리우드를 연 최초의 영화사다.
할리우드에 터를 잡은 그들은 뮈트(Mutt)와 제프(Jeff)라는 당시 인기있었던 신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무성 코미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찍은 첫 영화는 아니다. 1910년에 이미 ‘국가의 탄생’으로 유명한 DW 그리피스 감독이 17분짜리 단편영화 ‘인 올드 캘리포니아(In Old California)’를 할리우드에서 찍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를 단지 촬영지로 선택했을 뿐 할리우드를 본거지로 선택한 곳은 크리스티 였다.
할리우드의 탄생
크리스티가 할리우드 마을에 정착하던 무렵으로부터 20년 후 전 세계적인 영화 산업의 대명사가 되는 할리우드는 1887년까지만 하더라도 캘리포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척 마을이었다.
1800년대 초반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미국 영토가 된 캘리포니아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땅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금이었다.
180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이른바 골드 러쉬로 인해 황량한 땅 캘리포니아에 갑자기 사람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모든 이들을 서부로 서부로 불러들였던 골드 러쉬가 끝났지만, 서부에 모여든 대부분 사람들은 그대로 정착을 했고, 캘리포니아 곳곳에서는 개척 마을이 만들어졌다.
1880년대 후반 미국의 부동산 개발업자인 위슬리(H.J .Whitely)는 서부에 100여개가 넘는 도시를 조성하고 있었다. 위슬리는 LA 지역의 저명한 사업가인 이바 웨이드(Ivar Weid)와 함께 새로운 부동산 개발 계획을 고민했고, 윌콕스(Wilcox)라는 지역의 목장주는 도시 발전을 위해 이들에게 흔쾌히 땅을 기부했다.
윌콕스가 기부한 120에이커(약 14만7000평)의 땅이 바로 할리우드의 시작이 되었다.
윌콕스의 부인이었던 데이다(Daeida)는 웨이드에게 ‘할리우드 HollyWood’라는 이름을 전해 듣고 남편에게 새로 개발하는 지역의 이름을 ‘할리우드’라 짓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1887년 윌콕스는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역의 이름을 할리우드로 지었고, 위슬리와 웨이드는 땅을 기부해 준 기부자의 의견을 존중해 공식적으로 이 지역을 할리우드로 명명했다.
할리우드라는 이름을 지은 윌콕스의부인 데이다는 1891년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지역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시청, 도서관, 경찰서 같은 지역 인프라를 확충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교회에 토지를 기증하거나 문화 향상을 위해 젊은 화가들에게 거주지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는 데이다에게 ‘할리우드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선사했다.
할리우드 초창기...미움 받았던 영화인들
지금이야 할리우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의 산실이고 관광 코스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할리우드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인 윌콕스는 아마 자신이 기부한 할리우드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상상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니 아마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는 보수적이고 경건한 시골 공동체로 할리우드가 자리잡길 원했고 마을의 구성원들도 그의 그런 방침에 호응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할리우드 마을 사람들에게 크리스티같은 인간들은 뭔가 신용이 가지 않거나 심하게는 사기꾼 같아 보이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무슨 영화를 찍는다고 마을 곳곳에서 카메라를 세우고 무언가를 하는 그들이 보수적인 할리우드 마을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했다.
할리우드 마을의 상점들은 그들에게 불친절했고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거나, 그들의 촬영에 통행에 불편을 받은 몇몇 마을 사람들은 화가 나 촬영 중인 카메라 앞을 쓱 지나가거나 카메라 앞에 버티고 서서 촬영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크리스티는 이후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에서의 첫 촬영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의 할리우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영화사에 일하지 않더라도 영화에 대해 우리만큼 잘 알죠. 만약 우리가 오늘 할리우드 대로 한복판에 스탭들을 데리고 거리에서 차를 타고 내리는 남자의 장면을 촬영한다고 하면, 아마 우리는 100%에 가까운 시민들의 협조를 얻을 겁니다.
지금의 할리우드 사람들은 우리의 촬영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들어와 길을 건너는 배우를 위해 속도를 줄여주고 아무렇지 않게 카메라 밖으로 나갈 겁니다. 내기해도 좋아요. 지금의 할리우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이고, 스탭 입니다.”
그는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늘 퉁명스럽게 딴지를 거는 지역민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런 그의 진심을 안 지역민들이 점차 시선을 누그러뜨리게 되었고 할리우드는 곧 많은 영화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마도 크리스티가 보수적인 지역민들의 눈총과 텃세에 굴복해 할리우드에서 일찌감치 물러났다면 아마 지금의 할리우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음편, 워너브라더스 탄생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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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14, 2020 at 10:0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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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⑲ '영화산업 메카' 美 할리우드의 탄생 (상편) - 오피니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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